HIFICLUB, High-end Internet

하루가 멀다 하고 디지털 관련 오디오가 출시되는 요즘이다. 피씨 파이다 해드 파이다 해서 이전에는 상상도 못한 분야들이 열리고, PC가 버젓이 주요 소스로 부각하는가 하면, 각종 아이팟, 아이폰을 이용한 제품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작고, 휴대가 간편하고, 모양도 심플한 제품들이 점차 주류로 등장하는 요즘이다.
 
그런 가운데 아직도 케케묵은 진공관을 갖고 앰프를 만든다고 하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CD조차 찾아보기 힘든 요즘, 그보다 한 두 세대 훨씬 전의 유산을 아직도 메만지고 있다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흔들 법도 하다. 이런 현상은 젊은 층일수록 심하고, 심지어 “진공관이 뭐예요”라고 되묻기도 한다.

 

하지만 VTL이란 회사는 진공관의 가능성이 아직도 무궁무진하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진공관의 강점을 피력한다. 우선 심플하게 회로를 설계할 수 있다. 당연히 음의 전달 과정을 줄일 수 있고, 네거티브 피드백을 최소화할 수 있다. 혹 진공관에 오버로드가 걸려도 충분히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있다 ...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이 회사는 오로지 진공관만 주장하지는 않는다. 모스펫과 같은 솔리드 스테이트 소자도 활용하고, 디지털 관련 기술도 적극 도입한다. 파워 앰프의 경우 자동으로 바이어스가 조정될 뿐 아니라, 5극관 및 3극관 작동을 고루 제공한다. 한 마디로 진공관이라는 과거의 유물을 다루되, 그 장점을 극대화한 현대적인 제품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정말 궁금합니까? 바로 음질 때문입니다!
 

언젠가부터 괜찮은 프리앰프를 찾기가 힘들어졌다. 중고도 귀할 뿐 아니라, 수입되는 제품 리스트를 봐도 스피커나 파워 앰프에 비해 현저히 숫자가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피씨 파이나 해드 파이의 약진으로, 간단한 볼륨 조정은 PC에서도 가능해진 탓도 있고, 양질의 DAC에 프리 기능이 더해진 탓도 있으니, 이런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또 워낙 고품질 파일들이 눈부신 정보량을 자랑하기 때문에, 더우기 프리앰프, 그것도 진공관 방식이 설 자리는 줄어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지금부터 20년 전, CD가 나와 점차 세인의 관심을 끌 무렵 이런 논쟁이 벌어진 것도 사실이다. 이때 나온 몇 개의 명기들이 바로 프리앰프 무용론을 허공에 날려버렸거니와, 이번에 들은 TL 7.5(정식 명칭은 그 뒤에 레퍼런스 라인 스테이지 프리앰플리파이어가 붙는다)는 왜 이런 방식의 프리가 존재 가치가 있는지 확실하게 웅변해준다.
 
예를 들어 험이 뜬다거나 속도나 느리다거나 음이 불분명하다거나, 아무튼 터무니없는 편견을 가진 분들에게 본 기가 내는 생생하면서, 리얼하고, 다이내믹스가 풍부하고, 스피디한 음은 그야말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퀄리티를 얻기까지 좀 사연이 있다.

 

당초 TL 7.5라는 제품이 나온 다음(그런 면에서 본 기는 TL 7.5 MK2라 하겠다) VTL이 개발에 착수한 것은 TL 6.5라는 포노 앰프다. 카트리지에서 나오는 미세한 출력을 조심스럽게 증폭하는 과정에서 일체의 노이즈가 개입되면 안 되는 상황이다. 이 대목에서 엄청난 양의 전류를 쏟아 넣는 회로를 개발한 바, 정말로 적막강산의 고요함이 펼쳐진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착안, 본 기의 개발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끝없는 수정과 테스트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회로는 분명 보다 주파수 대역이 넓고, 음악성이 풍부하며, 투명도가 증가한 것은 맞지만, 원하는 단계까지 마무리 짓기가 수월치 않았다. 그 과정에 리스닝 테스트에 동원한 패널들의 충고도 많았고, 이를 하나하나 반영해서 무수히 업그레이드시킨 5명의 엔지니어들 역시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두 개의 섀시로 만들어진 본기가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우선 두 개의 몸체로 구성된 본 기에 대해 VTL측은 “클린/더티 박스”(Clean/Dirty Box)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즉, 하나는 더럽고, 지저분한 AC 전원을 보다 깨끗하게 처리하는 일을 담당한다면, 또 하나는 이렇게 말끔해진 전원을 바탕으로 신호 전달의 순수성을 최대한 높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덕분에 독립된 파워 서플라이와 컨트롤을 담당하는 섀시가 별도로 구성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밸런스 회로가 사용되었고, VTL이 자랑하는 하이브리드 기술이 투입되었다.

 

참고로 여기서 하이브리드 방식이란 다음과 같다. 우선 입력단에는 12AU7이라는 진공관을 두 개 쓰고, 반대로 출력단에는 모스펫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례적으로 출력 임피던스를 줄여 매칭되는 파워 앰프가 무엇이 되었건 무리가 없도록 했다. 요즘에는 자사의 프리 파워로 커플링해야 동작이 원활해지는 추세임에 비춰볼 때 상당히 유저 친화적인 발상이라 하겠다.
 

볼륨단에 투입된 정성도 대단하다. 누구는 프리앰프의 설계에서 볼륨단이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는다, 라는 주장도 하는데, 그만큼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VTL은 릴레이와 저항을 적절히 사용한 혁신적인 볼륨단을 개발한 바, 이에 따른 고품질한 음에 대해선 특필할 만하다.
 
외부의 열악한 환경, 특히 전원쪽에 대한 대책도 완벽하고, 부하에 대한 문제도 극복했다. 특히 긴 케이블을 사용할 때 제기될 수 있는 음질 열화나 그 밖의 문제들에도 초연하므로, 이는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본 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기능은 바로 “MON/PROC"이라 명명된 버튼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테이프 레코더에 녹음되는 음을 모니터링할 때 쓰이며, 그 경우 소스의 음이 아닌 레코딩이 된 음을 체크할 수 있다. 한데 또 하나의 기능이 숨어 있는 바, 서라운드 프로세서를 외부에서 연결할 경우 유용하다. 이때 본 기의 볼륨 기능은 정지하고, 오로지 프로세서의 볼륨에 따라 동작하는 것이다. 그 동기화가 본 버튼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아무튼 진공관 메이커들의 수가 많지 않은 요즘,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 가능성을 쭉 발전시켜온 VTL의 플래그쉽 프리앰프라는 점에서 본 기가 갖는 의의는 상당하리라 여겨지며, 이의 시청을 위해 당연히 파워 앰프는 동사의 지그프리드를 동원했고, 소스는 린데만의 825, 스피커는 JBL 4365 및 다인오디오의 포커스 340을 각각 연결했다. 시청 곡들은 필자가 편집한 음반에서 골랐는데,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얀센(바이올린)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중 행진》 정명훈(지휘)
-조수미 《도나 도나》
-조지 벤슨 《Golden Slumber/You Never Give Me Your Money》
 
멘델스존의 경우, 정말로 현기증이 나도록 스피디한 음에 놀랐다. CDP의 패스트 서치 버튼을 누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이 몰아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얀센의 경우 이렇게 빠른 연주를 장기로 하기에 이 속도가 정상이라 할 수 있다. 과연 광대역이라 느낀 것은, 고역부에서 천장을 찌를 기세로 돌진하는 바이올린의 음에 여유가 넘친다는 것이다. 또 그 음이 가늘거나 신경질적이지 않다. 묵직한 맛도 느껴지고, 라인도 분명하다. 포수 미트에 꽂힐 때까지 종속이 죽지 않는 돌직구를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 각이 예리하지 않은가? 오케스트라의 움직임도 일사분란, 척척 솔로 주자와 주고받는 인터 플레이가 정밀하게 묘사된다.
 
베를리오즈의 경우, 초반의 팀파니 부분이 서서히 압박해오는 대목이 절묘하다. 처음에는 살살 두드리다 점차 힘을 실어 폭발하는 단계까지 그 변화가 일목요연하며, 이어서 개재하는 브라스, 혼, 현 등의 움직임도 리얼하게 포착된다. 각 악기들의 음색이나 울림 등이 분명할 뿐 아니라, 입체적인 구조로 다가와 얼마나 소스의 정보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프리앰프인지 확인하게 된다.
 
조수미의 경우, JBL에서는 약간 투명하면서 시원시원하다면, 다인오디오는 밀도감이 높은 목소리로 다가온다. 둘 다 그녀 특유의 은은하면서 시정이 넘치는 매혹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는 바, 상당히 수준 높은 재생이 되고 있다. 중간에 나오는 클라리넷의 환각적인 부분도 빼놓을 수 없는데, 마치 한여름 낮에 바람이 부는 어느 시골길을 혼자서 걷는 듯한 상쾌함이 있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되는 재생이다.
 
마지막으로 약간 기름지고, 터프함이 넘치는 조지 벤슨은, 그 맛을 전혀 손상하지 않는다. 역시 JBL과는 상성이 좋아, 두툼한 깁슨 톤의 기타가 주는 남성적인 에너지가 일품이고, 올갠이나 드럼의 현묘한 음색은 기분 좋게 곡에 집중하게 한다. 반대로 다인오디오는 빼어난 해상력을 중심으로, 전체 앙상블을 곱게 다듬는데, 그런 면에서 약간 실내악의 느낌도 배어 있다. 어느 쪽이든, 조지 벤슨의 어씨한 느낌을 가진 목소리 재현에는 발군인 데다가, 각종 악기들이 엮어내는 하모니가 일품이어서 가벼운 발장단을 하게 만든다.